서문: ‘서도’는 마음의 길이다
먹을 간다. 붓을 든다. 종이 앞에 앉는다.
그 하나하나의 동작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마음을 정돈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행위이다──.
고대 중국의 선승 지영(智永) 선사는, 인생을 통해 이 사상을 구현하였다.
그의 서체는 뛰어난 기교를 넘어서, ‘쓰는 것 = 수행’이라는 깊은 정신성을 갖고 있다.
그가 체계화한 것으로 알려진 ‘영자팔법(永字八法)’은 서예의 기초이자, 불교 수행과 공명하는 ‘마음의 조율법’이기도 하다.
본 글에서는 지영 선사의 인물상과 영자팔법의 내용, 그리고 그것이 불교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지영 선사란 누구인가? ── 불문에 들어간 서성의 후손
왕희지의 혈통을 잇는 자
지영 선사(생몰년 미상)는 중국 남조 양나라에서 수나라 시기에 활동한 고승으로, 서성 왕희지(王羲之)의 7대 손이라 전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왕씨 가문의 서풍에 익숙했고, 이후 불문에 귀의하여 절강성 영흔사(永欣寺)에서 출가했다. 불전 앞에 천 권의 『천자문』을 헌정했다는 전설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서체는 ‘기도’이자 ‘수행’이었다.
영흔사에 칩거하며 30년간 붓을 든 남자
기록에 따르면 지영은 무려 30년간 영흔사에 칩거하며 외출하지 않고, 매일 불전에 천자문을 썼다.
소진한 붓은 수천 자루에 달했으며, 그것들을 절 경내에 묻었다고 한다. 현재도 그곳엔 ‘붓무덤(筆塚)’이 남아 있다 전해진다.
이 일화는 단순한 연습량의 과시가 아니라, ‘서예란 마음을 비추는 행’이라는 사상의 상징으로 전해진다.
영자팔법이란? ── 하나의 글자에 응축된 여덟 가지 붓법
‘永’ 자에 담긴 붓의 기본
‘영자팔법(永字八法)’은 ‘永’ 자 하나에 포함된 8가지 기본 붓법을 지칭하며, 서예의 기초 훈련으로 널리 사용된다.
이는 당나라 승려 지수 선사(智水禪師)가 수대 이전의 채옹(蔡邕)의 서법 사상을 정리·재구성하여, ‘永’ 자 하나로 체계화한 것이다.
이 한 글자를 통해 붓의 기본기술을 익히면 모든 한자에 응용 가능하다고 하며, 지금도 서예 교육의 핵심이다.
붓법 | 의미・비유 | ‘永’ 자의 해당 부분 |
측법(側法) | 새가 살짝 내려앉듯이 부드럽게 붓을 넣음 | 첫 점 |
륵법(勒法) | 말의 고삐를 꽉 잡듯이 힘을 주어 멈춤 | 세로 획 |
노력법(努法) | 꽉 눌러 힘차게 아래로 누름 | 하향 획 |
척법(趯法) | ‘퉁’ 하고 튀듯 날카롭고 재빠른 움직임 | 짧은 튀는 획 |
책법(策法) | 말을 채찍질하듯이 스윽 그어지는 동작 |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가로획 |
략법(掠法) | 머리를 빗듯이 부드럽고 매끄럽게 털어냄 | 좌획(왼쪽 털기) |
탁법(啄法) | 새가 모이를 쪼듯이 날카롭고 빠른 동작 | 좌하획(왼쪽 긋기) |
탁법(磔法) | 먹잇감을 찢듯이 힘 있게 털며 붓끝을 펼침 | 우획(오른쪽 긋기) |
서예와 불교는 왜 연결되었는가?
선종과 서예의 친화성
중국과 일본의 선승들은 깨달음의 경지를 말이 아닌 ‘일필로 전하는 마음’(以筆傳心)을 중시했다.
- 말없는 가르침을 서예에 담는다
- 서예 자체가 좌선과 같은 수행이다
서예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무심(無心)’ ‘무아(無我)’의 상태에 이르는 길이었다.
선승들의 서예, 즉 ‘묵적(墨跡)’은 글자보다는 마음의 기운이 드러난 예술이다.
불교의 ‘도(道)’와 서도의 ‘도(道)’
불교에서 ‘도(道)’는 번뇌를 벗고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길을 의미한다.
서도(書道) 또한 기술을 넘은 ‘마음의 길’로서 불도(佛道)와 깊이 공명한다.
- 서예는 ‘행(行)’이며, 좌선과 마찬가지로 정신을 단련하는 수행
- 붓법은 ‘율(律)’이며, 자율과 규율의 내면화
- 먹의 향기, 종이의 백색, 붓의 소리는 모두 ‘지금 여기에 집중’하기 위한 도구
『진초천자문』에서 보는 지영의 사상
교본이자, 기도의 글
지영의 대표작 『진초천자문(真草千字文)』은 정사각형 스타일(楷書)과 필기체 스타일(草書)로 천자문을 나누어 쓴 것으로, 당대 초학자들에게 최고의 교본이었다.
이 천자문은 내용 자체가 우주관・도덕・수신・역사・종교적 세계관으로 가득 차 있으며, 불교적 가치와도 높은 친화성을 지닌다.
기록에 따르면, “천자문은 문자 훈련일 뿐 아니라 정신 수양을 위한 경전”으로 여겨졌다.
용의 여덟 가지 원칙이 불교의 길인가?
여덟 가지 원칙과 고귀한 여덟 가지 길
불교는 실천의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을 제시하며, 이를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이라고 합니다:
- 정견(正見)
- 정사유(正思惟)
- 정어(正語)
- 정업(正業)
- 정명(正命)
- 정정진(正精進)
- 정념(正念)
- 정정(正定)
우연히도, ‘영자팔법’과 ‘팔정도’는 모두 여덟 가지 길을 제시한다. 겉모습만이 아닌, 내면의 ‘바름’과 ‘정돈’을 추구하는 공통된 구조가 그 안에 있다.
영자팔법은 붓의 움직임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의 의식과 행위를 바르게 다듬는 규범이며, 불교의 팔정도와 본질적으로 공명한다.
지영의 서예에 담긴 ‘정(靜)’과 ‘동(動)’
지영 선사의 서예에는 ‘정중동(靜中動)’과 ‘동중정(動中靜)’이 공존한다.
- 먹 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 붓을 종이에 대는 순간 숨을 멈추며
- 한 획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이는 곧 선(禪)의 실천 그 자체이다.
지영의 대표작 『진초천자문』은 정사각형 스타일(楷書)과 필기체 스타일(草書)을 병기한 작품으로, 형식과 자유, 규율과 생동의 조화를 상징한다.
결론: 쓰는 행위는 불심(佛心)과 마음을 잇는 길
지영 선사가 평생을 바쳐 추구한 것은, ‘서를 통해 불과 마음을 잇는 길’이었다.
영자팔법은 단순한 서예 기술의 기초를 넘어서, 정신을 다스리고 수행으로서의 서를 심화하는 열쇠이다.
이제 다시 붓을 들고, ‘永’ 자와 마주할 때──
그 한 획 한 획에, 1300년 전 선승의 호흡과 기도가 깃들어 있음을 느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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