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필절은왜잘려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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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인가, 계승인가. 일본 서예 문화의 심층

우리가 박물관이나 전시회에서 마주하는 고필절(古筆切, こひつぎれ).
그곳에는 원래 한 권의 두루마리나 한 첩의 책으로 존재했을 서예 작품이, 단편의 형태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도 귀중한 서예 작품들이 ‘잘려졌던’ 것일까요.
그것은 단순한 훼손이었을까요?
아니면 의도된 문화적 행위였을까요?

고필절은 일본 고유의 서예 문화가 만들어낸, 극히 복합적이고 깊은 의미를 지닌 존재입니다.

고필절이란 무엇인가 — 단편이라는 것의 의미

고필절이란, 헤이안~가마쿠라 시대를 중심으로 한 고필 작품을 의도적으로절단한서예단편을 말합니다. 고야기레, 세키도본 고킨와카슈, 마스시키시 등이 대표적입니다.

중요한 점은, 고필절이 우연히 남은 잔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 계획적으로
  • 감상과 학습을 목적으로
  • 미적 가치를 기준으로

잘려졌습니다.
즉, 고필절은 선별된 단편인 것입니다.

왜 ‘한 권 그대로’ 남기지 않았는가

현대의 감각으로 보면, “원래의 형태 그대로 보존했어야 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전근대 일본에서 서적은 고정된완성품이 아니었습니다.

  • 서예는 읽는 것이고
  • 감상하는 것이며
  • 선물하고 전승하는 것

용도와 시대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존재였습니다.
고필 또한 살아 있는 문화재로 다루어졌던 것입니다.

감상 문화의 성숙 — ‘한 글자를 보는 눈’의 탄생

고필절이 탄생한 배경에는, 서예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있습니다.
시대가 흐르면서,

  • 전체 구성보다 선질
  • 내용보다 필치
  • 이야기보다 순간의 표정

이 중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한 권 전체를 보는 것보다

  • 가장 아름다운 한 행
  • 가장 기운이 높은 한 글자

를 떼어내 감상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고필절은 고도로 세련된 감상 문화의 산물이었습니다.

고필미(古筆見)라는 지적 행위

고필절의 성립에는 고필미(古筆見)’ 라 불리는 전문적인 감식 행위가 깊이 관여합니다.
고필미란,

  • 서풍
  • 운필
  • 종이의 질
  • 행간
  • 먹색

등을 통해 작가와 시대를 판별하는 작업입니다.
이 과정에서, 서예의 본질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선택되어 잘려졌습니다.

즉, 고필절은 감정과 미의식이 결정화된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름’으로 인해 탄생한 보존과 계승

아이러니하게도, 잘려졌기 때문에 살아남은 고필도 적지 않습니다.
한 권 그대로였다면,

  • 마모
  • 충해
  • 화재

의 위험이 컸던 작품들이, 분할되어 각지로 흩어짐으로써 살아남은 사례도 있습니다.

고필절은,

  • 파괴이면서 동시에
  • 보존이며
  • 분산을 통한 연명 전략

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일본 문화에 깃든 ‘부분’의 미학

고필절의 배경에는 일본 문화 특유의 가치관이 보입니다.

  • 완전함보다 여운
  • 전체보다 상징
  • 말해지지 않은 부분에 대한 상상

이는 와카, 다도, 정원, 두루마리 회화에도 공통된 미의식입니다.
고필절은 ‘전체를 잃은 것’이 아니라, 상상을 열어주는 장치로 기능해 왔습니다.

고야기레가 말해주는, 잘려졌기 때문에 생긴 매력

고야기레는 고필절 문화의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단편이기 때문에 오히려,

  • 행간의 긴장
  • 여백의 호흡
  • 문자에 담긴 감정

이 강하게 전해집니다.
만약 한 권 그대로였다면, 이처럼 한 글자 한 글자에 시선이 집중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맺음말 — 고필절은 ‘파괴된 문화’가 아니다

고필절은 근대적인 보존 관점에서 보면, 분명 ‘파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본 서예 문화에서 그것은,

  • 선택하고
  • 나누며
  • 다음 세대로 전하는

행위였습니다.

고필절이란, 서예를 미래에 살리기 위해 내려진 극히 지적이고 미적인 결단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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