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기레와장정미술──와카를감싸는디자인의아름다움

일본 서예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고야기레(高野切)’
이는 단순한 가나 서예의 명작이 아니라, 와카를 아름답게 ‘감싸는’ 조형 예술의 결정체이기도 합니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쓰인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의 단간(단편)으로 알려진 고야기레는, 고전 가나 서예의 걸작으로 많은 서예가들에게 사랑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 매력은 서체의 아름다움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와카라는 언어 세계에 걸맞은 ‘장정 미술(装丁美術)’과 ‘표현 디자인’의 풍요로움이, 이 서예 작품을 더욱 빛나게 만듭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야기레와 그 배경에 있는 장정 예술과 표현 장식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어, 일본 미의식의 정수를 탐색해보고자 합니다.

고야기레란? ── ‘읽는 것’과 ‘보는 것’을 겸비한 예술

고야기레는 『고킨와카슈』의 필사본 일부가 단간 형태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뛰어난 가나 서체와 더불어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료시(料紙, 장식 종이)와 섬세한 장식이 더해져, 마치 ‘서예 그림 두루마리’처럼 보이는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이러한 고후데(古筆, 고대 필적)는 ‘언어’와 ‘조형미’의 융합체로, 와카를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통해 감상하도록 설계된 예술입니다.

장정이란 무엇인가? ── 서예를 ‘감싸는’ 문화의 시작

현대에서 ‘장정’이란 책의 커버나 표지 디자인을 의미하지만,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서예나 와카를 어떻게 감쌀 것인가, 어떻게 아름답게 제시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특히 고야기레 같은 와카 필사에서는, 단순히 ‘단어를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계절감·감정·시적인 정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사용된 것이 바로 아름다운 료시와 다양한 장식 기법이었습니다.

고야기레에서 볼 수 있는 료시 장식의 정수

금·은니(金銀泥)의 반짝임

고야기레 단편에는 금이나 은 가루를 사용해 하늘, 꽃, 안개 등의 문양을 장식한 것이 많이 보입니다.
이는 단순한 화려함이 아니라, 와카에 담긴 계절감이나 심상(心象) 풍경을 시각화하기 위한 장식입니다.

금니는 빛의 각도에 따라 반짝이며, 마치 시의 여운이 종이 위에 번지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비운(飛雲)・카스미히키(霞引き) 문양

연한 구름처럼 번지는 먹이나 안료로 종이 위에 ‘안개’를 표현하는 기법은 공간의 깊이감과 변화의 순간을 묘사합니다.

고야기레의 흐르는 가나 글씨와 어우러진 이 안개 장식은, 마치 시간과 기억의 자취를 종이에 담아낸 듯한 효과를 만듭니다.

카라카미(唐紙)와 당양(唐様) 문양

엠보싱 기법이 사용된 카라카미(당지) 또한 고야기레의 료시에 활용되었습니다.

섬세한 무늬와 문양의 레이어가 종이에 깊이를 더하고, 그 위에 문자가 마치 ‘떠오르듯이’ 배치됨으로써 시각과 촉각이 어우러지는 감각적 체험을 제공합니다.

서예와 장정의 일체화 ── 공간 예술로서의 고후데

고야기레는 단순히 ‘문자를 쓰는 행위’를 넘어서, ‘와카를 무대 위에 올리는’ 예술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수의 와카가 쓰인 종이의 여백 처리, 붓의 농담, 줄 간격의 속도감은 물론, 료시의 바탕 무늬나 색 조합까지 그 와카의 내용에 부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는 서예가가 단순히 글을 쓰는 것을 넘어, ‘구성’과 ‘연출’까지 직접 담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에 살아 숨 쉬는 장정의 정신

고야기레에서 볼 수 있는 ‘장정 미술’은, 오늘날 서적, 전시 카탈로그, 문구류 등 다양한 디자인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화지를 사용한 아트북이나, 금니 풍 인쇄 기술로 제작된 시집의 장정 등은, 고야기레와 같은 ‘단어를 감싸는 미의식’의 현대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 고야기레는 문자의 세계를 넘어선 ‘종합 예술’

고야기레는 단순한 서예 작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와카의 언어를, 아름다운 종이, 조화를 이룬 여백, 유려한 필선으로 감싸는 예술이며, 서예와 장정이 하나 된 종합적인 문화 표현입니다.

현대 서예에서도 선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장정적 시각을 가지는 것으로, 서예의 세계는 더욱 깊이를 얻게 됩니다.

고야기레에 담긴 장정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서예란, 단어를 전달하기 위한 무대 설계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