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와법첩, 무엇부터배워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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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의 ‘뼈’와 ‘호흡’을 둘러싼 선택

서예를 배우기 시작하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하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한비와 법첩, 어느 쪽부터 배워야 하는가?”

돌에 새겨진 힘찬 글자를 마주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종이에 쓰인 명필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할 것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교재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서예를 어떤 예술로 이해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태도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한비란 무엇인가 ── 서예의 ‘골격’을 배우는 자리

한비(漢碑)란 돌에 새겨진 문자 자료를 가리킵니다.
후한에서 당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사업이나 종교적 기념으로 제작된 것이 많으며, 그 안에는 강한 규범성과 구조 의식이 깃들어 있습니다.

한비에서 배울 있는

  • 선의 굵기와 무게에 대한 논리
  • 점획의 시작과 끝이 지니는 엄격함
  • 문자 구조의 안정감
  • 서예에서의 ‘법(규칙)’에 대한 감각

돌에 새긴다는 행위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한비의 글자는 한 획 한 획이 극도로 자각적이며, 우연성보다 필연성이 전면에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한비는 서예의 신체 구조를 단련하기 위한 교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첩이란 무엇인가 ── 서예의 ‘호흡’을 배우는 자리

반면 법첩은 종이에 쓰인 명필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왕희지로 대표되는 러닝 스타일, 필기체 스타일, 그리고 일본의 가나 고필에 이르기까지, 필자의 신체 감각과 감정의 흔들림이 짙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법첩에서 배울 있는

  • 선과 선을 잇는 기운의 흐름
  • 속도의 변화와 리듬
  • 호흡과 붓놀림의 일치
  • 필자의 정신 상태가 선에 드러나는 방식

법첩의 선은 항상 움직이고 있습니다.
멈춘 것처럼 보이는 선 안에도 다음 동작을 예고하는 기운이 숨어 있습니다.

여기서 배우는 것은, 서예란 살아 있는 운동이라는 감각입니다.

왜 ‘대립 구조’로 말해져 왔는가

역사적으로 한비와 법첩은 종종 대립적으로 설명되어 왔습니다.

  • 한비: 강건함 · 규범 · 골력
  • 법첩: 유려함 · 자연스러움 · 정감

그러나 본래 이 둘은 적대 관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서예를 성립시키는 개의 바퀴입니다.

골격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고,
호흡만으로는 설 수 없습니다.

이 관계는 인간의 신체 그 자체와 닮아 있습니다.

『서보』가 말하는 ‘치우치지 않는 배움’

서예 이론의 세계에서는 일찍부터 이러한 편향에 대한 경고가 있었습니다.

서예는 법에 지나치게 기대면 죽고,
감정에 빠지면 무너집니다.

즉,

  • 구조를 배우지 않고서는 자유가 없고
  • 자유를 모른 채로는 구조가 살아나지 않는다

는 뜻입니다.

한비만 배우면 글씨는 쉽게 경직되고,
법첩만 좇으면 가볍게 흘러버립니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서예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초보자는 무엇부터 배워야 할까?

그렇다면 실제 학습 순서는 어떠할까요.

일반적인 지침

  • 정사각형 스타일 · 사무 스타일을 배우는 단계
    → 한비를 중심으로 구조와 선질을 몸에 익힌다
  • 러닝 스타일 · 필기체 스타일 · 가나로 나아가는 단계
    → 법첩을 통해 기맥과 리듬을 배운다

다만 이것은 절대적인 순서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아는 입니다.

  • 선이 약하다 → 한비로 돌아간다
  • 글씨가 딱딱하다 → 법첩을 접한다

이러한 왕복 운동이야말로 서예의 성장을 떠받칩니다.

일본 서도에서의 독자적 수용

일본에서는 한비와 법첩의 수용이 더욱 복합적인 양상을 띱니다.
가나 서예라는 독자적 문화가 탄생하면서, 법첩적인 감각이 중시되는 장면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명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기저에는 반드시 한자 서법의 골격이 존재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한비가 지탱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곳에서는 법첩이 호흡합니다.

이것이 일본 서도의 심층 구조입니다.

맺음말 ── 선택이 아니라 ‘오가는 것’

“한비와 법첩, 어느 쪽부터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합니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서예의 배움은 직선이 아니라 왕복입니다.

  • 한비로 뼈를 세우고
  • 법첩으로 숨을 통하게 하며
  • 다시 한비로 중심축을 바로잡는다

이 순환 속에서만 서예는 성숙합니다.

지금 당신의 글씨가 너무 딱딱하다면 흐름을,
너무 가볍다면 무게를 찾으십시오.

한비와 법첩은 언제나 당신의 양옆에 서 있는
명의 스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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