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사나 고필의 세계를 접하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테카가미(手鑑) 입니다.
언뜻 보면, 명필의 단편을 모아 놓은 ‘견본첩’처럼 보이는 테카가미.
하지만 실제로 테카가미는 단순한 자료집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 누구를 위에 두고, 누구를 아래에 배치할지
- 어떤 유파를 중심에 둘지
- 무엇을 ‘정통’으로 볼지
등과 같은 강한 사상과 가치 판단이 깃들어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테카가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붙이는 방식’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지를
역사적, 사상적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테카가미는 ‘명필의 집적’이다
테카가미의 기본적인 역할
테카가미란,
역대 명필의 단편(고필절)을 대지에 붙여 책 형태로 정리한 것을 말합니다.
주요 용도는 다음 세 가지였습니다.
- 서풍과 필적 감상
- 임서나 학습용 모범
- 진위 판단의 기준 자료
즉, 테카가미는 보기, 배우기, 판단하기 위한 서예 아카이브였던 것입니다.
왜 ‘단편’인가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많은 테카가미에 수록된 것이 완본이 아니라 단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단순한 보존상의 이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 글자, 한 행에서 필자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난다
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테카가미는 ‘사상의 서적’이다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제외할 것인가
테카가미는 무작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 누구의 필적을 넣을지
- 어떤 시대를 중시할지
- 어떤 유파를 중심에 둘지
이 모든 것은 편자의 서관(書觀), 미의식, 사상에 따라 결정됩니다.
즉, 테카가미는
“나는 이렇게 서예 역사를 이해하고 있다”
라는 무언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테카가미는 ‘서예 정전’을 보여준다
어떤 테카가미에 수록된 필자들은,
그 시대와 편자에게 정통 계보를 구성합니다.
반대로, 수록되지 않은 서예가나 서풍은 주변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붙이는 방식에 나타나는 ‘서열’
배치는 우연이 아니다
테카가미를 주의 깊게 보면,
단편의 배치에 명확한 질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서두에 배치되는 인물
- 중심부를 차지하는 서가
- 말미에 배치된 필적
이는 서예의 등급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구조입니다.
상위에 배치되는 서의 특징
많은 경우,
테카가미의 서두나 요점에는
- 왕희지 중심의 법첩 계열 서예
-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가나 명필
이 배치가 놓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여기가 기준이다”
“여기서 평가가 시작된다”
라는 무언의 메시지입니다.
테카가미와 감정 문화의 관계
테카가미는 ‘자’였다
고필의 진위를 판단할 때,
사람들은 테카가미를 참고했습니다.
하지만,
테카가미 자체가 이미 가치 판단의 집합체이므로
감정 역시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감정은 사상의 계승
어떤 테카가미를 기준으로 성장한 감정가는
그 테카가미의 서열과 가치관을 무의식적으로 계승합니다.
이렇게 테카가미는 사상을 재생산하는 장치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왜 붙일 필요가 있었는가
서는 ‘단편’에서야 말한다
언뜻 잔혹해 보이는 ‘절단’ 행위.
하지만 그 안에는 독특한 서예 이해가 있습니다.
- 완전한 이야기보다, 순간의 필세
- 전체 구성보다, 한 획의 호흡
서의 본질은 단편 속에 깃든다는 사상입니다.
붙임으로써 생기는 대화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서가의 필적을
한 권 안에서 마주 보게 합니다.
그로 인해,
서와 서 사이에
비교, 대화, 평가가 발생합니다.
테카가미는 서예 역사를 나란히 읽기 위한 장치입니다.
테카가미가 말하는 서예 세계의 엄격함
테카가미를 해석하면,
거기에는 아름다움뿐 아니라
엄격한 선별의 현실이 드러납니다.
- 남는 서
- 남지 못한 서
- 중심에 놓이는 서
- 주변으로 밀려나는 서
테카가미는 서예 세계가 결코 평등하지 않았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결론 ── 테카가미는 ‘무언의 서론’이다
테카가미는 단순한 명필집이 아닙니다.
그것은
- 서예 역사관
- 미의 기준
- 정통과 이단의 경계
을 붙이는 방식이라는 침묵의 구조로 이야기하는, 매우 웅변적인 책입니다.
한 장 한 장 단편 뒤에는
편자의 사상과 시대적 가치관이 숨어 있습니다.
테카가미를 보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서예 세계 자체의 질서를 읽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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