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쓰기’는 단순한 선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무심코 글씨를 씁니다. 그러나 서예의 세계에 한 걸음 들어서는 순간, 그 행위는 ‘예술’로 변모합니다. 한 줄기 선 속에, 작가의 감정과 사상, 정신 상태가 고스란히 담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서예 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표현, 의전필후(意前筆後) 입니다.
이는 “글씨를 쓰기 전에 마음을 다듬고, 그다음에 붓이 따라야 한다”는 서예의 근본 철학을 뜻합니다.
이 글에서는 단순한 기술적인 설명을 넘어서서, ‘의전필후’라는 사고방식이 서예의 정신, 자세, 붓놀림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다각적으로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의전필후’란 무엇인가?
의(意) – 글씨를 쓰기 위한 ‘의식’, ‘구상’, ‘정신의 준비’
여기서 ‘의’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 구도, 집중력을 포함한 종합적인 정신적 준비를 말합니다. 쓰려는 글자의 이미지, 균형, 붓의 흐름, 전체적인 구성 등을, 붓을 들기 전에 머릿속에서 완전히 그려내야 합니다.
필(筆) – 마음이 움직이면 몸이 따른다
붓은 그 ‘의’에 의해 움직입니다. 반대로, 의도가 없이 움직인 붓은 ‘그저 그런 선’에 불과합니다. 붓은 마음의 연장선이자 신체의 끝부분이며, 마음에서 나오는 명령을 ‘형태’로 나타내는 도구입니다.
의전필후의 위치
이 개념은 고전 서예론과 인격 수양을 중시하는 서예 교육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예를 들어, 당나라 서예가 유공권(柳公權)의 “마음이 바르면 붓도 바르다(心正則筆正)”라는 말은 바로 이 ‘의전필후’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냅니다.
왜 ‘의전필후’가 서예의 핵심이 되는가?
이유 1: 서예는 단 한 번의 승부인 예술이다
서예는 회화처럼 덧칠하거나 수정할 수 없습니다. 붓이 종이에 닿는 그 순간, 마음의 상태가 그대로 선으로 남게 됩니다.
그래서 글씨를 쓰기 전의 정신적 준비, 즉 ‘의’가 무엇보다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이유 2: 선에는 정신의 떨림이 담긴다
『서예 입문 강좌』라는 교재에서는 중학생이 “글씨를 쓰려 하니 손이 떨린다”고 고백하며, 마음의 상태가 선에 얼마나 투영되는지를 보여줍니다.
- 마음이 흐트러지면, 붓도 흔들립니다.
- 정신이 산만하면, 선도 약해집니다.
반대로 마음이 안정되고 정돈되어 있다면, 붓끝에 자연스럽게 힘이 실리고, 선에는 생명이 깃듭니다.
이유 3: 무의식적인 습관을 극복하기 위해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습관이 형성됩니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그저 많이 쓰는 것이 아니라, 한 획 한 획에 명확한 의도를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의전필후’를 실천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습관을 넘어서서, 진정한 자신의 의지로 글씨를 쓰는 힘을 기르는 과정입니다.
‘의전필후’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단계
단계 1: 쓰기 전에 구성한다
- 쓰려는 글자의 크기, 균형, 중심축, 붓의 시작과 끝을 눈을 감고도 떠올릴 수 있도록 이미지화한다.
- 글자 하나뿐만 아니라, 종이 전체의 구성과 여백까지 의식하며 어디에 무엇을 쓸지를 명확히 한다.
단계 2: 호흡을 정돈한다
- 글씨를 쓰기 전에 심호흡을 1~2회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 서예는 ‘호흡의 예술’이기도 하다. 호흡이 안정되면, 붓의 흐름도 안정된다.
단계 3: 의도를 담아 붓을 들이댄다
- 붓을 내리기 전에 “이 획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어떤 표정을 담을 것인가?”를 명확히 한다.
- 망설임 없이 입필하고, 중간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이상적이다.
초보자가 ‘의전필후’를 활용하는 포인트
| 과제 | 대응 방안 |
| 무심코 습관적으로 쓰게 됨 | 한 글자 쓸 때마다 ‘어떤 선을 그리고 싶은가’를 먼저 생각하는 습관을 들인다 |
| 정서 시 긴장하여 손이 떨림 | 쓰기 전에 완성된 글자의 이미지를 명확히 그려서 긴장을 완화한다 |
| 구성의 균형이 어긋남 | 종이에 쓰기 전, 머릿속에서 먼저 전체 구도를 그려보는 시간을 갖는다 |
초보자일수록 많이 쓰는 것보다는, 한 번 한 번 의도를 담아 정성스럽게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의전필후’를 배우는 올바른 자세이며, 가장 확실한 성장의 지름길입니다.
‘의전필후’의 배경에 있는 동양적 사고
이 사고방식은 동양 철학과 선(禪)의 사상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서예 또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선을 넘어선 정신적 예술이며, 붓은 단지 마음의 진동을 나타내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의전필후’는 바로 이처럼 정신이 육체를 이끌고, 무의식조차 의지로 조절하는, 서예에서 말하는 심신일치(心身一致)의 궁극적 이상을 표현한 철학입니다.
정리: 쓰기 전에 이미 써 있다
‘의전필후’라는 말은, 붓을 들기 전 이미 승부는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름다운 글씨를 쓰는 사람은, 붓을 움직이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서 작품을 완성해 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필치는 흔들림 없이 강하고, 보는 이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여러분도 오늘부터 글씨를 쓰기 전에, 한 호흡, 한 구상을 소중히 여겨보세요.
그 작은 습관의 축적이 선으로 드러나고, 언젠가는 당신만의 서풍(書風)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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