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당나라(618–907년)는 중국 서예의 황금시대로 알려져 있으며, 이 시기에 많은 서예가들이 기량을 겨루었습니다. 특히 “당나라의 사대가”로 이름을 떨친 서예가들은 당나라 서예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초기 당나라의 삼대가인 오양순 (欧陽詢) , 여세남 (虞世南) , 저수량 (褚遂良) 과 당나라 중기의 얼굴진경 (顔真卿) 이 그들입니다. 본 기사에서는 이들의 업적과 서체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진: 중국 산시성 시안의 치은사 대야탑
(*야탑 성교서 서문의 석비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당나라의 성립과 태종의 서예 지원
당나라는 618년에 이연이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로, 7세기 중반에는 주변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제2대 황제 태종(이시민)은 “정관의 치”라 불리는 통치를 펼치며 장안을 국제적인 번영 도시로 발전시켰습니다. 태종은 서예 애호가로서 왕희지의 서적을 수집하고 홍문관을 설립하여 고관과 귀족의 자제들에게 서예를 가르쳤습니다. 이를 통해 서예의 발전이 촉진되었고, 오양순 (欧陽詢) , 여세남 (虞世南) , 저수량 (褚遂良) 의 세 서예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오양순 (欧陽詢) (557–641년)
생애와 배경
오양순 (欧陽詢) 은 당나라 초기에 활동한 서예가로, 정자체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가지고 수나라에서 고관으로 일했습니다. 이후 당나라 성립 후에도 중용되어 태종에 의해 학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서체와 대표작
오양순 (欧陽詢) 의 서체는 정제되고 섬세한 정자체가 특징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구성궁이천명(九成宮醴泉銘)” 은 당나라 태종이 여름 별장인 구성을 기념하여 당시 학자 위징에게 문을 작성하게 하고 오양순 (欧陽詢) 에게 쓴 비문입니다. 이 비문은 후세에 “정자체의 극치”로 칭송받습니다. 오양순 (欧陽詢) 의 서법은 “오법”이라고 불리며, 그 정확성과 우아함으로 많은 서예가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사진 : “구성궁이천명(九成宮醴泉銘)” 의 타쿠모토
여세남 (虞世南) (558–638년)
생애와 배경
여세남 (虞世南) 은 태종의 두터운 신뢰를 받으며 서예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왕희지의 7대 손인 지영에게 서예를 배웠습니다. 여세남 (虞世南) 은 당나라 태종의 중용을 받았으며, 장안(현재의 시안)의 공자묘 재건을 기념하여 서예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사후, 그의 유해는 태종의 묘인 소릉에 묻혔습니다.
사진 : 중국 시안시의 산시성 박물관 비림 “공자묘당비 (孔子廟堂碑)”
서체와 대표작
여세남 (虞世南) 의 서체는 온화하면서도 강인한 특징을 가지며 “여법(欧法)”이라고 불립니다. 그의 대표작인 “공자묘당비 (孔子廟堂碑)” 는 당나라 태종이 장안의 공자묘를 재건했을 때의 기념비로, 여세남 (虞世南) 의 정자체의 아름다움과 품격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의 서체는 오양순 (欧陽詢) 과는 달리 독특한 품격과 우아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진 : 중국 시안시의 산시성 박물관 비림 “공자묘당비 (孔子廟堂碑)”
저수량 (褚遂良) (596–658년)
생애와 배경
여세남 (虞世南) 은 태종의 두터운 신뢰를 받으며 서예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왕희지의 7대 손인 지영에게 서예를 배웠습니다. 여세남 (虞世南) 은 당나라 태종의 중용을 받았으며, 장안(현재의 시안)의 공자묘 재건을 기념하여 서예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사후, 그의 유해는 태종의 묘인 소릉에 묻혔습니다.
서체와 대표작
저수량 (褚遂良) 의 서체는 “저법(褚法)” 이라고 불리며, 특히 정자체에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작인 “맹법사비 (孟法師碑)“,는 97세에 사망한 여성 도사 맹법사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저수량 (褚遂良) 이 47세에 쓴 것입니다. 원석은 분실되었지만, 전해지는 탁본을 통해 그의 만년 서체를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작품으로는 “안탑성교서(雁塔聖教序)” 가 있으며, 이는 현장법사가 가지고 온 불경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저수량 (褚遂良) 의 강력하면서도 우아한 정자체가 특징입니다.
사진: 중국 산시성 시안의 치은사 대야탑
(*야탑 성교서 서문의 석비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Yan Zhenqing (顔真卿) (709–785 AD)
생애와 배경
얼굴진경 (顔真卿) 은 당나라 중기의 서예가로, 충성을 다하며 생애 동안 여러 차례 유배를 당했습니다. 안록산의 반란에서는 의병을 모집하여 용감히 싸웠으나, 권력자들의 질투를 받아 유배되었고, 반란 진압 임무를 수행하던 중 사망했습니다.
사진 : 중국 시안시의 산시성 박물관 비림 “얼굴씨가묘비(顔氏家廟碑)”
서체와 대표작
얼굴진경 (顔真卿) 의 서체는 “안법(顔法)” 이라고 불리며, 힘차고 당당한 정자체가 특징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제질고(祭姪稿)” 는 사망한 사촌의 자녀를 위해 쓴 추도사의 초안으로, 강한 감정과 힘있는 필치가 드러나 있습니다. “쟁좌위고(争坐位稿)” 는 좌석 순서에 대한 항의문 초안으로, 얼굴진경 (顔真卿) 의 힘과 자유로운 필치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작품인 “얼굴씨가묘비(顔氏家廟碑)” 는 얼굴씨 일족의 역사를 기록한 비석으로, 얼굴진경 (顔真卿) 의 호방하고 강력한 정자체가 두드러집니다.
사진 : 중국 시안시의 산시성 박물관 비림 “얼굴씨가묘비(顔氏家廟碑)”
결론
“당나라의 사대가”는 각각 독특한 서체를 가지고 있으며, 당나라 서예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의 작품은 당나라 서예의 정점이며 현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의 업적을 이해하고 서체를 배우는 것은 서예의 깊은 세계를 탐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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